[자유기고] 인문학과 여유의 정신
[자유기고] 인문학과 여유의 정신
  • 한남대신문
  • 승인 2022.04.05 16:57
  • 조회수 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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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국문•창작학과 김홍진 교수
▲ 국어국문•창작학과 김홍진 교수

 나로서는 중학교 때 처음 배운 영어 ‘school’, 이 익숙한 단어는 그리스어 ‘스콜레’(schŏlē)에서 유래한다. 학교가 처음 생기고 서양에서는 학교를 ‘스콜레’라 불렀다. 본뜻은 ‘여유’다. 불어의 ‘에꼴’(école)도 여기서 온 말이다. 왜 ‘여유’, 해석은 간단하다. 지금이야 교육평등의 이념이 보편화되어 누구나 학교에 간다. 그러나 옛날 학교에 다니는 일은 특권 중 특권이었다. 일하고 먹고살기 급급한 노예나 하층 계급은 학교에 다닐 여유가 없었다. 육체노동에서 자유로운 여유 있는 몇몇 귀족이나 지배 계급만 학교에 갈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른바 ‘자유교양’(liberal arts)에서 ‘자유’란 육체노동과 변별되는 개념을 지시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신분적 편견이 작동하고 있다. 

 학교의 어원이 여유인 사실은 계급적인 의미만이 아닌 학교의 성격과 본질을 암시한다. 가령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는 서양 최초의 학교(대학)다. 그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 들어오지 말라”는 문구가 새겨 있었다. 왜 하필 기하학, 그건 기하학이 학문의 성격과 공부의 본질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하학은 경험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보편적인 공부의 성격을 상징한다. 이 보편성을 정초하려는 지향이 여유의 정신이다. 여유의 정신은 자동화된 사고를 멈추고 반성과 성찰, 창조적 사유와 감각을 가능케 한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눈앞의 실용성에 포박된 사고와 통념의 벽을 무너뜨리고 개방하려는 투쟁의 장이 되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대학의 본령이었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담론이 운위되어 오고 있다. 인문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왜곡된 인식과 홀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는 부지기수다. 일례로 “인문학이라는 건 공학이나 자연과학 분야를 공부하며 병행해도 되는 것”이며, “많은 학생들이 대학 4년과 대학원까지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대통령 당선인의 후보시절 언급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인문학은 졸지에 기생하는 부수적 존재이거나 없어도 그만인 무용한 처지로 전락해버렸다. 이런 표현은 그저 밭만 일구라는 화전민 부락 촌장에게나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근대 이후 산업은 전문 분업화를 통해 발전해 왔다. 단순분업에서 공장제분업을 거쳐 이젠 학제 간 소통이 힘들 정도다. 하지만 산업이후 혹은 기술혁신 이후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산업과 경제는 이 편향을 보정할 수밖에 없다. 넓게 파야 깊이 들어갈 수 있다. 마술적 기술의 첨단 사회에서 기술 격차는 몇 개월 차이에 불과하다. 기술경쟁은 레드오션, 이런 상황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은 빌렘 플루서가 말하는 ‘기술적 상상력’, 즉 상상력을 기술로 구현하는 힘과 기술이 촉발하는 상상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산업이후, 즉 경제가 기술혁신을 통해 발전하던 시대의 끝에 와 있다. 이 지점에서 산업은 새로운 상상력을 통해 진화하는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

기술혁신 이후 대중은 상품의 기능이나 효용성이라는 물질적 가치가 아니라 아름답고 영적이며, 감각적이고 심미적인 가치를 요구한다. 롤프 옌센이나 다니엘 핑크와 같은 미래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듯 미적 감각과 감동, 독창성, 의미, 스토리, 그리고 영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미래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을 폐하고 도대체 그걸 어디서 찾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미래가 요구하는 바는 심미적 감각일 텐데, 그건 아무리 파시스트적 가속력과 리버스 엔지니어링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성취하기 힘든 일이다. 그건 바로 여유의 정신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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