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수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신태수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이름난 목수 석(石)이 곡원이라는 곳을 지나가다가 어마어마하게 큰 가죽나무를 보았다. 그 나무는 사람들에게 사당나무로 모셔져 제사를 받고 있었다. 나무의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가 쉴 수 있을 정도였고, 줄기의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다. 높이는 마치 산 같았고, 가지도 땅 위에서 열 길이나 되는 높이에서야 비로소 갈라져나가기 시작했는데 가지 하나로 배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이나 굵었다. 그런 가지가 수십 개나 되었다.
  그 엄청난 나무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석은 나무를 다루는 목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를 한번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버렸다. 석의 제자들은 그 나무를 이리저리 꼼꼼하게 살펴본 후에 석에게로 달려가 물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따르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훌륭한 재목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이런 나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버리셨습니까?”
  “헛소리 그만해라. 저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다. 저 나무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아버리고, 널을 만들면 금방 썩어버린다. 가구를 만들면 쉽게 부서지고, 문을 만들면 나무진이 솟아나 엉망이 되고, 기둥을 만들면 금방 좀이 먹어버리고 만다. 저건 결코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저렇게 크고 오래 살게 된 것일 뿐이다.”
  그날 밤, 석의 꿈에 그 가죽나무가 나타나서 말을 했다.
  “너는 도대체 나를 무엇에 비교하는 것이냐? 결국 인간에게 쓸모있는 나무하고만 비교하는 게 아니냐. 배나무, 귤나무, 유자나무 따위는 인간에게 쓸모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열매 때문에 수난을 당한다. 열매를 따느라 비틀리고 찢기어, 큰 가지는 부러지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 끝에 제 명대로 못 살고 일찍 죽고 만다. 그 나무들의 장점이 궁극적으로는 자기 생명을 단축시키고, 인간들에게 짓밟히게 만드는 것이다. 무릇 이 세상의 물건뿐 아니라 인간들조차도 모두 쓸모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면서 이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내내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자 한결같이 노력해왔다. 천수를 마쳐가는 요즘에 와서야 겨우 그것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만일 쓸모있는 존재가 되고자 했다면 이렇게 오래 살 수 있었겠는가? 벌써 일찌감치 베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너희 인간에게 쓸모없는 것이 나에게는 참으로 쓸모있는 것이 된 것이다.
  너와 나는 모두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한갓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다른 피조물의 가치를 평가해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가치를 평가하기로 하자면 너처럼, 쓸모있는 존재가 되고자 자신의 생명을 깎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냐? 쓸모없이 죽어가는 인간이 어찌 내가 쓸모없는 나무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겠는가!”
  잠에서 깨어난 석이 제자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자, 제자들이 물었다.
  “그 나무는 그토록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자 했으면서, 어째서 마을을 수호하는 사당나무가 되었을까요?”
  “모르는 소리는 이제 그만들 하거라. 그 나무가 사당나무가 된 것은 자신이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 임시로 그런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그 나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하더라도 그 나무는 단지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들의 헛소리로 흘려들을 뿐이다. 그 나무는 사당나무가 되지 않았더라도 인간에게 베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그 나무는 인간의 판단 기준과는 반대로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존재를 인간의 얄팍한 상식으로 가늠하고자 한다면 엉뚱한 견해만 나올 뿐이다.”(??莊子?? ?人間世?)

  인문학이라는 유령

  지금 한국사회에는 인문학이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 취업과 자기계발에 의해 죽은 시인과 철학자들의 망령이 불려나오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 지식정보, 빅데이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경쟁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으로서 인문학이 호출된 것이다. 방방곡곡에 인문학 강좌가 개설되고 서점에는 인문학 서적들이 쏟아져 나와 전국적으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그러나 정작 대학에서 인문 학과들의 현실과 미래는 암울하다. 구조조정의 1순위 대상으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문 학과는 쓸모없다는 것인데, 인문학에 열광하면서 인문 학과는 쓸모없다고 박대하니 아니러니다. 인문학은 유령에 불과한 것일까?

  도구적 인문학

  가치를 기준으로 인문학의 중요성을 논한 한 철학자는 인문학의 가치를 도구적 가치와 본질적 가치로 나눈다. 도구적 가치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도구적 가치,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도구적 가치를 말한다. 오늘날과 같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남들보다 앞서려면 창의력이 필요한데 창의력은 논리적 사유가 아니라 상상력의 산물이고, 그러한 창의적 상상력은 문학작품의 이해와 분석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훈련할 수 있다. 문학작품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빚어낸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과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반성적으로 비판하여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인문학적 고전들이 자극하여 키워준다고 한다. 이러한 도구적 가치는 마치 앞의 ??장자??의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그 나무를 사당나무로 받들어 섬기는 것과 흡사하다. 인문학이 뭔가 영험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그 힘을 빌어서 경쟁력을 키워 남보다 앞서려는 욕망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경쟁력 향상을 위한 수단으로서 불려나와 우리 사회를 떠돌고 있는 망령과도 같다.

  인간다움, 인문학의 본질적 가치

  반면에 인문학의 본질적 가치란 인간의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인간다움[人文]’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인간만이 가진, 즉 인간의 고유성에 대한 탐구와 교육이 바로 인문학의 본질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나아가 어떻게 살아야 인간다운 것인가를 탐구한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도록 만들고, 또한 결단을 하도록 이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자본이나 과학기술이 아니라 인문학이다.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미 도래하고 있는 인공지능(AI)의 시대에 인류의 가장 큰 문제는 취업이나 돈이 아니라 ‘인간다움’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업률과 경제논리 위주로 학과와 대학을 평가하여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 교육부와 대학의 현실은 인문 학과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폄하하고 있다. 실로 석(石) 같은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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