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의 친구
너희는 나의 친구
  • 윤예림
  • 승인 2019.10.0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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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조용훈 교수(교목실장, 기독교학과)
조용훈 교수(교목실장, 기독교학과)

 인간은 애정만으로나 우정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인가보다. 한 유명 대중가수의 노랫말 가운데 여친과 절친 사이를 오해한데 대해 잠시 흔들렸던 우정에 대해 미안해하는 내용이 있다. 이 노래보다 몇 년 앞서 더 유명한 가수가 크게 히트시킨 노래가 있었는데 그 노랫말 역시 자신의 여친과 친구가 언제부터인지 연인관계로 변한 걸 알게 되며 괴로워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노래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애정과 우정 모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애정과 우정은 둘 다 사랑이지만 차이가 있다. 애정이 육체를 매개로 한 사랑이라면, 우정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사랑이다. 애정이 첫눈에 빠져드는 사랑이라면, 우정은 포도주가 숙성하듯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랑이다. 애정이 질투나 소유욕 같은 파괴적 힘에 종종 사로잡히는 사랑이라면, 우정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랑이다. 그런 배경에서 기독교 문학가 C. S 루이스는 우정을 가리켜 천사들이 나누는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천상의 존재들이나 나눌 수 있는 이런 고귀한 사랑을 지상에서 누렸던 사람들도 있었다. 구약성경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사울의 부하요 정적이었던 다윗 간의 우정 이야기가 나온다. 요나단의 주검 앞에서 다윗은 탄식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나를 향한 그대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소.” 신약성경에는 예수가 당시 랍비(선생)들과는 달리 제자들을 가리켜 친구라 불렀다고 한다. 당시 스승과 제자 사이가 마치 주인과 종의 관계에 가까웠던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이다. 실제로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공유했고, 소명과 꿈만 아니라 신적 체험의 비밀까지 나누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서는 마치 주인을 대하는 종이 하듯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 ‘친구를 위해 죽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던 자신의 우정관을 삶으로 보여준 것이다.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이런 친구를 한 명이라도 둘 수 있다면 큰 행운이다.

 우정하면 금방 떠오르는 대상이 학창시절의 단짝 동무다. 나이가 들어 사회에 진출해도 얼마든지 친구를 사귈 수 있지만 아무래도 어릴 적 친구만은 못한 듯하다. 나이가 들면 순수함보다는 타산적이 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학창시절의 마지막 단계를 보내고 있는 대학생 시기야야말로 친구다운 친구를 사귈 수 있는 마지막 순수의 시대일 것이다.

 생떽쥐베리는 <어린왕자>에서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다고 말한다. 우정이란 서로 길들여지는 과정인데 시작과 끝이 있는 생명체와 같다. 어떤 사람과 공감하는 일이 있을 때 우정=은 시작된다. ‘너도 그러니? 나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우정을 더 성장시키려면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어떤 때는 오해를 불러오는 말 대신에 조용히 침묵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여기에다 내 경험 하나를 덧붙이자면 지적질을 하지 않아야 한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려면 그를 지배하거나 통제하려고 해선 안 된다. 그런 행동은 그의 친구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나 주인, 혹은 선생이 되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나이와 신분을 초월해서 우정을 나눌 친구가 있는 삶은 행복하다. 나이들 수록 가치가 더하는 자산이다. 그러므로 우정을 위해서라면 시간과 돈, 에너지의 투자를 아까워말아야 한다. 이 아름다운 가을날, 캠퍼스가 젊은이들의 우정으로 물들어가기를 꿈꾼다. 교실에선 교수와 학생 사이에, 사무실에선 함께 일하는 동료들 사이에 우정이 깊어가는 공동체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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