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 소설] 제자리 물장구
[투고 소설] 제자리 물장구
  • 서정이
  • 승인 2019.10.14 11:50
  • 조회수 3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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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언론국방학과 16 김민겸

 무더위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8. 살갗을 찌는 더위에 에어컨을 켰다가, 어제 날라 온 전기세 고지서를 보고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다시 전원 버튼을 누른다. 매년 이맘때 뉴스에서는 역대급 더위라는 제목의 보도가 연이어 나온다. 단전에서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수십 번 떨어진 A 회사의 불합격 통보 메일의 내용만 되뇐다. [귀하의 자질만큼은 높이 평가 되었지만 제한된 인원을 선발해야 하는 상황이라 부득이하게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갑갑함에 못 이겨 들어간 SNS 속에 친구들의 프로필에는 합격 내용, 취업 내용만 눈에 보인다. 졸업 후 3년간 제대로 된 일자리 한번 구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스스로 불쌍하다고 생각이 든다.

 

 특별한 재능도 없이 군대를 제대 후 복학했다. 결국 졸업할 때엔 몇 개의 공모전 수상과 도움 안 되는 자격증 서너 개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렇다고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며 내세울 거라곤 남들 다 한다는 스피치뿐이지만 그마저도 항상 서류 탈락이니 말짱 도루묵이다. 그렇다고 대학 전공과 거리고 멀고 인력 착취도 심한 중소기업에 들어가기도 싫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르바이트로 생계유지는 꼬박꼬박 해나가고 있다. 이 얼마나 모순된 삶인가? 올해가 지나면 토익 점수 또한 초기화된다. 더 이상 공부할 자신도 없고 올해 안에는 꼭 취업해야 한다. 하반기마저 떨어지게 된다면 그 뒤에 일은 생각하기도 싫다. 그만큼 가장 중요한 때인데 왜 이리 의지가 없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불쌍하다.

 

 일을 나가기 전 담배 한 대를 태우며 대학생 때를 떠올려본다. 늦었긴 했지만 3학년 때부터는 쉴 틈 없이 살았다.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지만 제대도 1월에 했기 때문에 별다른 휴학 없이 대학생활을 보냈고 2년간 이 회사 저 회사 알아보며 미래를 구상했었다. 입학했을 때는 졸업하면 바로 취업하고 원하는 삶을 살고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를 더욱 채찍질했다. 결국 다 부질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상황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사람을 돌변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연달아 피고 있는 담배나, 자취방 앞 벽에 붙어있는 수영 강습 광고지가 눈에 들어왔다. 잊고 살았던 그때가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날의 엄살이지만 그래도 가장 힘들었던 대학교 2학년 이맘때이다.

 

 언제나처럼 더웠던 8월이었지만 온갖 혈기로 가득 찼던 때였다. 방학만 되면 괜한 오기가 생겨 방학의 컨셉을 잡곤 했다. 1학년 여름의 컨셉은 걷기였다. 한여름에 35km를 걸으며 행군의 맛보기를 하다가 며칠을 쓰러져 있었다. 그랬던 나는 그때를 만회하고자 이번에는 계절에 맞는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여름이라는 계절 특성 상 야외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 제한되었고 작년 며칠간 기절했었던 것을 본 엄마는 집에서 공부나 하라는 말씀만 하셨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가 보시던 TV 속에 베이징 올림픽 때 박태환 선수의 활약상에 영감을 받아 수영을 배워보기로 하였다. 마침 지인이 수영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금액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평소에 운동을 좋아했던 터라 자신만만하게 수영장에 입장했지만 현실은 크게 달랐다. 배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처음 물에 뜨는 것조차 입문자들에게는 버겁다. 하지만 진짜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힘차게 발을 구름에도 나아가지 않을 때다. 오랜 시간 동안 수백 번, 수천 번의 물장구를 처도 25m 목표지점의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옆 라인에서는 나보다 어린 친구들. 심지어 연세가 꽤 드신 분들도 나를 놀리듯, 물 위에서 자유롭게 떠다닌다. 오기로 객기로 하루 수 시간씩 물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좀처럼 실력은 늘지 않았다. 시작하고 며칠간은 물에 간신히 뜨는 것만으로도 신기했지만 2주가량 했음에도 진전되지 않는 실력에 지쳐있을 때쯤, 친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어릴 적부터 같이 살았던 지라 할머니의 죽음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발인을 마치고 감정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설상가상으로 여자 친구에게 이별 통보까지 받았다. 이유도 모른 채 다가온 첫 이별에 크게 낙심하던 나는 그렇게 수영은 둘째 치고 다른 일조차 손에 잡히지 않게 되자 휴학 신청을 하였다. 아무 목적 없는 삶을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이듬해 봄에 입대를 하였다.

 

 좋지 않았던 기억은 담배연기를 달게 만들어줘 입안에 쓴맛들을 지워준다. 마지막 한 모금을 깊게 마신 뒤 뱉어낼 때, 문득 과거와 지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수없이 헤엄치지만 제자리였던, 악재까지 연이어 몰아쳤던 그때와 취업 걱정에 치이며 밥값, 집세까지 괴롭히는 현재. 어느 것이 더 힘들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고통은 별 것 아니었던 듯이 미래의 나는 현재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분명 더 예전에도 당시에는 버티지 못할 만큼 힘들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잘 버텨왔고 지금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곤 정신 차리자며 내 뺨을 두어 번 쳐본다. 머리가 맑아온다. 현재에 목매어 제자리 물장구를 치고 있는 것은 나뿐이 아닐 테지.

 

 분명 나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있을 거야. 지금이 너무 괴롭고 놓아버리고 싶다면 만일 그렇다면, 옛날 가장 힘들었던 때를 떠올려 보자.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던 그때를.

너무 쉽사리 놓아버렸던 그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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