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강력한 피의자 신상공개
명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강력한 피의자 신상공개
  • 박효선
  • 승인 2020.02.19 13:53
  • 조회수 2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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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제주 전남편 토막 살인사건’으로 구속된 피의자 고 씨의 신상이 공개됐다. 고 씨는 5월 제주의 한 펜션에서 전남편을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 내 해상과 육지에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칼, 고무장갑과 같은 범행도구를 미리 구입하고 표백제를 사는 등 계획범죄의 정황이 드러났으며 이 사건으로 고 씨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국민 청원까지 진행되었다.

2010년 특정 강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이 개정된 이후 인신매매, 살인, 약취유인, 강간 등의 흉악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의 신상공개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법개정이 된지 10년이 지난 현재, 신상공개의 기준이 일관되지 않다는 비판과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국민이 이끈 피의자 신상공개

 원칙적으로 유죄판결을 받지 않은 피의자의 신상공개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금지된다. 하지만 2010년, 흉악범죄 피의자의 신상공개가 가능하도록 특강법이 개정되었다. 그 배경에는 2000년대 후반 ‘유영철 연쇄 살인사건’, ‘경기 남부 연쇄 살인사건’ 등 반인륜적인 범죄 사건의 등장과 그에 분노한 여론에 있다. 2008년 ‘안양 초등생 피살사건’ 이후 그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얼미터’에서 전국 성인 남녀 53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범죄 예방과 국민의 알 권리 보장 차원에서 흉악범죄 피의자의 신상공개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87.4%라는 압도적인 비율로 집계되었다.

2009년 ‘강호순 연쇄 살인사건’ 당시 신상공개 관련 법령은 갖춰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위와 같은 거센 여론으로 인해 주요 일간지는 강호순의 사진을 비롯한 피의자의 신상을 보도했다. 이후 2010년, 특정 강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특강법)이 개정돼 피의자 신상공개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제8조의 2항에 피의자 얼굴 등의 신상공개가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과 그에 따른 네 가지 요건을 명시했다. 피의자 신상공개 여부는 특강법에 명시된 네 가지 요건을 기준으로 해당 피의자의 관할 지방경찰청에서 구성한 신상공개 심의위원회의 비공개 투표를 통해 신상공개 여부가 결정된다.

이를 바탕으로 올해 ‘제주 전남편 토막 살인사건’, ‘한강 몸통 시신 사건’, ‘경제 사범 이희진 부모 살인사건’의 피의자를 포함해 현재까지 20명이 넘는 피의자의 신상이 공개되었다. 흉악범에 대한 신상공개가 계속해서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이에 따른 여러 문제가 생기고 있다. 가령 피의자에 대한 인권문제, 헌법에 위반되는 위헌 소지 문제 등이 있다.

 

위헌 소지 고려가 필요한 피의자 신상공개

 국민 여론과 함께 결정된 일부 흉악범의 신상공개는 범죄예방 효과와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현재 그 실효성과 공익성은 미약하다. 언론중재위원회 대전 사무소장 양재규 변호사는 “실제로 수배 중인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할 경우 또 다른 범죄의 예방효과가 있을 수는 있지만, 이미 검거된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범죄예방에 있어 실익이 크지 않다”라고 주장했다. 2010년, 미국 범죄학자인 리처드 튜크스버리와 웨슬리 제닝스는 신상공개제도 도입 전후의 차이를 재범 유형별로 세분화해 조사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성범죄자의 재범률이 ‘12%’로 나타나 신상공개가 재범예방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만한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를 통해 피의자의 신상공개가 직접적으로 범죄예방 효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좌제는 범죄자와 일정한 친족 관계가 있는 사람이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책임을 지우는 제도로, 형벌과 신분상의 불이익이 있다. 연좌제는 근대화가 진행되던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폐지되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3조 3항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해 자기 책임의 원칙을 선언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낙인효과로 연좌제의 문제에 처해있다. 고려대 법학 전문대학원 하태훈 교수는 “피의자의 신상이 공개되면 SNS로 정보가 빠르게 오가는 요즘 시대에 피의자의 가족, 지인 등에까지 연좌제와 같은 폐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범죄 피의자의 신상공개로 인한 낙인효과는 책임이 없는 피의자 가족에게 극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주며 이들을 제2의 범죄자 혹은 자살로 이끈다. 영화 ‘영도’는 범죄자 신상공개로 인한 범죄자 가족의 연좌제 문제를 다룬다. 극중 판사의 “할머니와 영도 잘 들으세요. 두 사람은 아들과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살인범) 때문에 평생 세상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봉사하시면서 사셔야 될 사람들입니다”라는 대사는 연좌제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범죄 피의자 신상공개는 사법부의 판결이 내려지기 이전부터 피의자를 범죄자로 인식하게 해 헌법에 명시된 무죄 추정의 원칙을 위반한다. 또한, 국민의 감정적 반응으로 사법부의 독단적인 판단을 방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신상공개 기준에 대해 구체적인 의논이 필요한 이유이다. 현재 법안 개정이 진행 중이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준이 필요한 피의자 신상공개

 신상공개 자체에 위헌적 소지가 있어 특강법 제8의 2조 1항은 네 가지 요건을 법으로 규정하고, 이 요건들을 갖춰야 신상공개가 가능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네 가지 요건에는 범행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특정 강력범죄사건 일 것. 피의자가 그 죄를 범하였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을 것. 국민의 알 권리 보장, 피의자의 재범방지 및 범죄 예방 등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할 것. 피의자가 청소년에 해당하지 아니할 것이 있다. 2항에는 ‘피의자의 인권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결정하고 이를 남용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명시되어있다.

법의 개정으로 국민들이 흉악 범죄자에 대해 이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게 됐지만, 네 가지 요건만으로 신상공개를 판단하는 것은 기준의 명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있다. 이러한 비판이 잇따르자 2016년, 경찰은 특강법에 명시된 신상공개 요건을 구체화해 40여 개 항목의 세부지침을 담은 체크리스트를 배포했지만 신상공개의 효율성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상공개 뒤 제주 전남편 살인사건 피의자 ‘고유정’은 이동 시에 ‘머리카락 커튼’으로 자신의 얼굴 노출을 막았다. 이를 두고 일부 시민은 “살인마, 고개 들어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경찰이 이러한 고유정의 행동을 제지할 방법은 없다. 경찰 수사공보 규칙에 따르면 “경찰은 얼굴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해선 안 된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후 신상공개에 관한 실효성 논란이 거세지자 경찰청은 ‘머그샷’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머그샷이란 구속된 피의자를 식별하기 위해 경찰이 촬영하는 사진이다. 피의자는 얼굴 전체가 보이도록 머리카락 등을 정리하고 정면과 측면에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 정식 명칭은 ‘폴리스 포토그래프(Police Photograph)’로 얼굴을 가리키는 속어인 머그(mug)에서 유래했다. 우리말로는 ‘낯짝’ 정도가 된다.

현재 경찰은 법무부에 머그샷 제도 도입이 현행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인지 질의서를 보냈고 이를 법무부가 검토에 들어갔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법무부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법무법인 ‘해자현’의 조은결 변호사는 “법무부가 보수적인 견해를 내놓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제도의 도입이 추진되고 있지만 여전히 신상공개 문제에 대한 본질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범죄 피의자 신상공개 문제의 본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신상공개 여부를 결정하는 법적 요건을 구체화해 법률로 정해야 한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피의자가 조헌병을 앓고 있는 중증 정신질환자라는 이유로 신상을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해 발생한 ‘수락산 살인사건’과 ‘오패산터널 살인사건’의 피의자들도 같은 정신질환인 조헌병을 앓고 있었지만, 위원회는 이들의 신상공개를 결정했다. 같은 사유임에도 불구하고, 공개 여부가 달라 명확한 기준을 알 수 없어 하루빨리 구체화된 법률 마련이 필요하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이 밝혀지고, 이에 신상공개를 요구하는 국민청원까지 등장한 이때, 신상공개 법적 요건의 구체화 필요성에 대한 국민과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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