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회 한남문학상 소설 부문 당선작
44회 한남문학상 소설 부문 당선작
  • 미디어 한남
  • 승인 2018.04.0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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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그림자

문예창작학과 4학년 조소희

의대 예과에 다닐 무렵이었다. 사귄지 얼마 안 된 여자가 경복궁 야간개장에 가고 싶다고 졸라 겨우 시간을 내 데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경복궁역 5번 출구를 통해 궁을 밟았었는데 넓은 터 다음으로 궁문을 지나니 경복궁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근정전이 보였다. 함께 간 여자는 교태전과 경회루가 보고 싶다며 나를 재촉했었는데 그때 유독 근정전 기둥 및 세 발 달린 솥이 눈에 밟혔었다. 세 발. 태양에 산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까마귀 삼족오의 발 또한 세 개다.

*

2주에 한 번 정기적으로 만나는 여자가 오늘은 만나기 힘들 것 같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래 뭐 그렇다는 데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봐. 답장을 보내고 연락처를 뒤적였다. 오늘은 누구를 만나야 할까. 문자를 보내고 있을 때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상대방은 한참 뜸을 들였다. 여보세요. 답을 한 번 더 재촉하자 그제야 나 지수예요하고 말해왔다. 지수? 당장 떠오르는 여자가 없어 옛날에 만났던 여자들에 대한 기억까지 뒤적였다. 지수가 누구였더라. 그때 스피커 건너에서 저 박지수예요라는 목소리가 넘어왔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는 이미지가 되어 떠올랐다. 아 그래 정말 오랜만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니?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지수의 희고 보드라워 쉽게 멍이 들던 피부가 떠올랐다.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진한 갈증이 일었다. 그냥요. 잘 지내나 해서요. 어 나야 잘 지내지. 오늘 시간 괜찮으면 저랑 술 한 잔 해요. 어 어 그래 나야 좋지. 멍청하게 말을 더듬었다. 긴장감과 기대감이 한껏 뒤섞였다. 어린 기억 속의 지수는 마을 남자들이 모두 동경하던 소녀였다. 그녀의 손 한 번 입술 한 번 젖가슴 한 번이라도 쥐어보고 싶어 수컷들은 지수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도도하고 순진했던 지수라니. 응 그래 거기 잘 알아. 그래 그럼 조금 있다 거기서 보자. 전화를 끊자 진한 갈증이 일었다. 흰 가운을 벗고 출근할 때 입고 왔던 수트로 갈아입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차 요원에게 열쇠를 넘겼다. 뽑은 지 얼마 안 된 거니 조심히 다뤄. 네에. 떨떠름한 대답이 돌아왔다. 레스토랑 입구를 열고 들어가니 적당히 채워진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예약 하셨나요? 아니요. 일행이 먼저 와 있을 겁니다. 손님을 맞는 웨이터를 세워두고 최근 통화 기록에 남은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자치고 저음의 차분한 목소리를 가진 지수가 전화를 받았다. 지수는 가게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랜만이네. 잘 지냈니? 내 말에 어설프게 웃은 지수와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이제 막 나온 것 같은 음식과 와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꽤 오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고 낮지 않은 도수의 술에 달큰하게 달아올랐을 즘 우리는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지수는 위스키를 주문했고 나는 술기운과 함께 올라오는 기대감에 과음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지수는 뽀얗고 탱탱하던 피부를 잃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래 지수는 여전히 예뻤고 나는 마을을 기억하는 수컷이었다. 기대감에 내가 지수에게 꼬리를 흔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리고 지수도 그런 시선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처럼 나를 보며 웃어주지는 않았을 거다. 지수도 나에게 마음이 있어서 연락한 거겠지. 나는 장기전이 될 술자리를 위해 잠시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행동 하나 하나에 신경을 많이 썼지만 바닥은 출렁거려 신체 균형은 깨졌고 다리에 힘은 풀렸다. 화장실은 술집 구석에 박혀 있었다. 마지막 칸의 문을 잠근 후 변기를 부여잡고 점심에 먹은 식사를 전부 게워냈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입 안을 여러 번 헹궈내고 난 후에야 다리의 힘이 돌아왔다. 거울을 보며 차림새를 정리하고 난 다음 테이블로 돌아오니 지수가 괜찮아요?하고 물어왔다. 그럼 괜찮지. 페이스를 유도하려다 내가 먼저 당할 번했군. 그래 아직 나는 괜찮았다. 물을 마시고 안주를 집어들자 지수가 잔을 들어 나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술잔이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

환자들에게 마취는 셀 수도 없이 많이 했었지만 당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것도 부분마취들만 해 봐서 전신마취를 받은 적은 없었는데 전신마취제에 취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누군가 머리에 망치를 내려치고 있는 것 같은 격통 속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분명 나는 지수와 만났고 2차로 옮겨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한 순간에 정신을 놓을 수 있는 거지? 술이 덜 깼는지 천장이 돌고 있었다. 모든 감각들이 몸과 거리를 두고 있는 기분이었고 눈알은 뽑힐 것 같았다. 내장은 손톱에 박박 긁힌 상태에서 기름에 절여진 기분이었고 머리의 통증은 갈수록 진해지고 있었다. 병원이라도 가야겠다 싶어 손을 들어 올리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끼고 상황을 확인하려고 눈을 떠 고개를 올렸을 때 낡은 철제 침대에 손발이 모두 묶여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혹시 지수의 취향인가. 이번에는 진짜 갈증이 일었다. 목은 말랐고 속은 뒤집힐 거 같았고 머리는 부서진 듯 아팠다.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가 가벼워 보이는 게 어쩌면 움직일 수 있을지 몰라 몸을 뒤틀어 봤지만 바닥과 벽에 고정 돼 있었다. 녹슨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했다. 지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술을 마시다 함께 납치된 건가? 그렇다면 지수는 지금 어디 있지? 안전하겠지? 왜 납치된 거지? 원하는 게 뭐기에 이렇게 방치하는 거야. 결박을 풀 수는 없을까? 여기는 정확히 어디야.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눈을 굴려 방 안의 상황을 파악하며 탈출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을 때 발자국 소리와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는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은 척 실눈을 뜨고 나에게 다가오는 범인의 실루엣을 가늠했다. 도대체 날 납치한 놈은 누구야.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긴장감에 식은땀이 솟아나는 게 느껴졌다. 작고 마른 체구.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상대를 파악하고 있을 때 범인은 침대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깬 거 알고 있어.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들켰다는 사실보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침대 맡에 앉아 있던 납치범은 어제 와는 사뭇 다른 표정의 지수였다. 어떻게 그녀가 이곳에 있을까. 아니 왜 나를 납치한 걸까. 도대체 이 여자가 원하는 건 뭘까. 혹시 공범이 있기라도 한 걸까. 예상 밖의 상황에 뒷목이 싸하게 식어가고 두피에 소름이 돋았다. 뭐야. 소리가 갈라져 목에 맴돌며 울렸다. 목 근육들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의도한 단어들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편도와 기도의 근육이 제멋대로 날뛰는 거 같았다. 벙어리처럼 말도 잇지 못하고 있자 지수가 경멸을 섞어 웃었다. 많이도 해 쳐 드셨네? 지수는 가지고 들어온 서류 뭉치들을 뒤적이며 나를 조롱했다. 내용물이 무엇인지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 담긴 나에 대한 정보들이 대충 짐작이 됐다. 어디에서 저 정보들을 얻은 거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이 여자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경악과 공포로 채워진 눈으로 지수를 바라봤다. 변변찮은 물건으로 여자는 뭐 이렇게 많이 호리고 다녔어. 자고 일어나 반쯤 발기해 있던 성기가 지수의 눈빛 하나에 가라앉았다. 그래 지금의 심정은 딱 해부용 시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목도한 그런 기분이었다. 이 여자가 내가 알고 있던 지수가 맞는 걸까. 의구심이 나를 덮쳐왔다. 잘 들어 살아서 나가고 싶으면 앞으로 내가 하는 말은 무조건 들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 안 그러면 다 죽여 버릴 거야. 지수의 눈이 흡사 짐승과 사냥꾼의 눈 그 중간 까마귀의 눈처럼 번들거렸다.

*

메탄에 3개의 수소를 염소로 치환한 화합물로 트리클로로메탄의 약전명인 클로로포름은 투명한 휘발성 액체로 특유의 냄새가 나며 약간 달고 찌르는 것 같은 맛이 난다. 액체의 클로로포름은 불연성이나 증기는 연소하고 공기와 빛에 의해 서서히 산화 돼 맹독을 지닌 포스겐을 생성하기 때문에 갈색 병에 넣어 마개를 꼭 닫아 차갑고 어두운 곳에 보관해야 한다. 클로로포름은 흡입 전신마취제이며 영국 심프슨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어 외과수술에 새 기원을 열었다. 클로로포름 증기를 흡입하면 대뇌를 마비시키는 작용이 있어 큰 수술에 사용되었으나 심장‧긴장‧간에 장애를 주어 현재는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살충제 혹은 곰팡이 제거제로 사용되며 공업용 접착제로 사용된다.

지수는 내게 클로로포름을 술에 타 먹였으니 하루의 유예 시간을 준다고 했다. 그녀가 내게 자비를 베풀어 줬으니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접착제로 쓰이는 독성 강한 마취약을 술에 타 먹인 일에 분노해야 하는 것일까. 조용히 미친 여자는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인가. 하마터면 깨어나지 못하고 저세상에 소속될 뻔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제 이 여자는 잔인하게 미친 박 지수였다. 미저리에게 감금당한 폴 셸던은 나보다 나은 처지였다. 최소한 그는 그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작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나는 이 여자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저 침대에 묶여 결박당한 채 할 수 있는 거라곤 처지에 대한 고민뿐이었다. 나는 동정심을 바라는 눈빛으로 지수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가 동정심을 느낄 턱은 없었다. 그녀는 간간히 들어와 끼니와 화장실을 챙겨줬다. 이렇게 번거로울 바에야 차라리 결박을 풀어줬으면 서로 편하겠다 싶지만 그녀가 그렇게 멍청한 여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지수는 주도면밀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탈출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괜한 시도를 하다가 다리뼈를 부러뜨리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였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지수를 기다리는데 허비하게 됐다. 그리고 그녀는 나타날 때마다 옷을 털며 들어왔다. 방에 들어오는 그녀는 상기된 피부와 유독 높게 올라왔다 꺼져버리는 가슴 높이 멀리서도 들리는 숨소리와 달아오른 것 같은 동공을 했다. 그런 지수를 보면 분명 활동성이 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이렇다 할 소리가 들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대체 그녀는 무엇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도무지 그 일이 무엇인지 짐작도 알아낼 방법도 없었다. 조사는커녕 지금 나는 당장 화장실도 마음대로 나다니지 못하는 처지였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을까 나는 그렇게 계속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납치범에게 왜 납치를 했냐고 묻는다고 대답할 만한 범인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문을 닫고 들어온 지수는 피곤해 보였다. 탁 풀린 눈은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침대와 마주하고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아 가지고 들어온 위스키 병으로 나발을 불었다. 나는 그녀의 주량이 놀라웠다. 내 기억 속에 남은 어린 시절의 그녀는 이미 세월에 삭아 사라지고 난 후였다.

“까마귀가 날아다녀.”

그녀는 허공을 응시하며 이야기했다. 지수는 주정과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말을 했고 나는 지수가 취했다고 생각했다. 까마귀가 날아다녀 지금도 이 공간을 날아다니고 있어 깃털이 바닥에 떨어져 지저분해. 까만 게 수북하게 쌓여서 지금 방을 채우고 있어. 나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허공을 이리저리 응시하는 지수는 사실 tv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죽은 것 같은 동공으로 도넛을 입에 쑤셔 넣으며 배 위로 빵가루 대신 술 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넘치도록 병나발을 불었다. 까마귀가 똑똑한 건 알고 있니? 그래서 그런 가 이 까마귀는 늘 나에게 말을 걸어. 아니 명령을 해.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 중 가장 선명한 첫 기억의 시작은 어머니와 관련됐다. 어머니는 까마귀를 혐오했었다. 생김새와 행동도 싫어하셨지만 유독 울음소리를 싫어하셨다. 그래서 까마귀 울음만 들리면 빗자루를 들고 뛰어다니며 욕을 뱉으며 재수 옴 붙었다라고 했었다. 나는 할머니와 마루에 앉아 그런 어머니를 구경했었다. 그 모습을 본 어린 나는 어머니의 모습이 코미디보다 더 웃기다고 생각했었다. 어머니가 그럴 때면 할머니는 나를 다독이듯 말하시곤 하셨다. 민석아 까마귀는 아주 좋은 동물이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유달리 힘차게 들려 나는 묻곤 했다. 어디가요? 어린 손자의 질문에 할머니는 아득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끄집어내곤 했었다. 옛날 옛날 사람들은 까마귀가 사람에게 해야 할 일이나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영험한 존재라고 생각했었지. 그리고 까마귀는 죽은 자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기도 한단다. 그러니까 까마귀는 아주 좋은 동물이야. 할머니와 내 대화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까마귀 눈을 하고 우리를 보곤 했다. 지금 지수의 눈도 그때 어머니의 눈과 다르지만 닮았다. 내가 만약 자유로웠다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tv를 좋아하지 않았다.

*

뻑뻑한 눈으로 정오가 한참 지난 아침을 맞이했다. 이곳에 강제로 지내게 된 뒤로는 시간 리듬이 깨져버렸다. 소파에 잠들었던 지수는 내 팔목을 결박하고 있던 구속과 함께 사라지고 난 후였다. 나는 쓰린 손목을 주무르며 일어났다가 발목에 채워진 무거운 쇠사슬을 봤다. 확실히 지수는 철저한 여자였다. 바라고 바라던 자유를 얻게 됐지만 차마 밖으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유를 가늠하기 어려워 방안을 서성였다. 그냥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간단한 일인데 그 간단한 일이 두려워 괜히 머뭇거렸다. 차라리 창문이라도 있다면 탈출을 시도하기라도 할 텐데 방 안에는 오직 지수가 들어오는 문과 욕실로 향하는 문 밖에 없었다. 이런 공간은 대체 어떻게 구한 걸까. 지수는 내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고 나는 호기심을 극도로 경계하는 성격이다. 나는 일단 침대에 앉아 지수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일단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됐다. 혹시 스톡홀름 증후군이 발병한 걸까. 나는 원인모를 두려움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참을 생각했다. 형광등은 임종을 코앞에 두고 깜빡 거렸고 사방은 관 속처럼 고요했으며 긴장감은 시간을 가질수록 덩치를 키워나갔다. 나는 결국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무의식에 가까웠던 동작을 어색하게 느끼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둥근 손잡이가 손에서 미끄러지지는 않을까 나답지 않은 걱정을 하며 문을 열었다. 경계의 밖은 이곳과 달리 진한 어둠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최소한 창문 정도는 있을 줄 알았지만 당장 불을 밝혀야 했다. 어둠은 인간에게 공포를 안기고 마치 까마귀 뱃속에 들어있다는 착각을 갖게 한다. 나는 문을 기점으로 오른쪽 벽을 더듬으며 스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불이 필요해. 마비된 시각은 촉각을 증폭시키지는 않았다. 땀을 잔뜩 흘리며 벽을 더듬어 가다 다다른 곳에는 차가운 철문이 느껴졌다.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나는 자라면서 돈과 성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공부를 했다. 서울에 있는 아이들과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기계가 돼야 했고 나는 마을에 소문이 날 정도로 공부에 미친놈이었다. 그런 나를 부모님은 꽤나 자랑스러워했지만 할머니는 불만스러워했었다. 민석아 밥 먹어라, 그만 자거라. 나는 할머니가 그럴 때면 늘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라고 말하고 워크맨 이어폰을 뒤집어썼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무언의 행동을 할머니는 씁쓸해 하셨다. 하지만 난 내 목표를 포기할 수 없었고 노력의 결과는 고등학교 졸업 직전에 빛을 발했다. 시골 촌동네 마을에서 의대에 합격한 인물이 나왔다고 당시 사람들은 잔치를 열었다. 우리 부모님의 귀는 입에 걸렸고 나는 성취감과 뿌듯함 그리고 자만심을 가졌었다. 그건 일종의 작은 보상과 같았고 나는 그 보상을 지수와의 관계에 조금 이용했다. 당시 마을에서 가장 미인이라고 소문났던 지수를 노리는 남자들은 많았다. 다들 누가 먼저 지수와 섹스를 할 수 있을까 눈치를 보다가 내기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가장 유력한 인물은 나와 지석이었다. 우리 둘은 지성과 외모로 라이벌 구도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지수와 관계를 맺고 싶은 한편으로 지석이를 이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회는 쉽게 나지 않아 나는 지수에게 가진 감정을 질질 끌고 있었다. 그때 마을 또래 아이들이 그 기회를 만들어줬다. 한창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들은 잔치 상에 오른 술에 관심을 가졌고 얼큰하게 취한 어른들을 피해 술을 빼돌려 마시기로 계획했다. 이에 동조한 몇몇 여자 아이들이 지수를 꼬여내는데 성공했다. 아이들은 작은 머리를 굴려 우리 집에서 가장 먼 지수의 집에 훔쳐온 막걸리와 안주를 펼쳐놓고 술판을 벌였다. 다들 알코올은 처음 접해본 상황이라 몇 잔 먹지도 못하고 쉽게 취해버렸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막걸리를 들이키던 아이들은 쓰러져 코를 골며 자거나 토를 하거나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 난장판이 된 술자리에서 가장 멀쩡했던 건 나와 지수였다. 지수는 입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술을 몇 모금 먹지 않았고 나는 지수와 대화를 위해 술을 자제하고 있었다. 나는 기회를 엿보다가 아이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때 지수에게 다가가 잠깐 이야기를 하자며 따로 불러냈다. 지수는 처음에 조금 망설이는 척을 하다 내 제안을 수락했다. 우리는 아이들의 눈을 피해 방을 빠져나왔고 시골 밤길 위 지수는 익숙한 길임에도 내 뒤를 따랐다. 나는 지수를 어디로 데리고 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마을 둔덕에 있는 농기구 창고로 목적지를 잡았다. 이맘때면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창고는 한 겨울이었지만 꽤 습했고 나는 마주보고 선 지수에게 좋아한다는 사탕발림을 전했다. 지수는 처음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답을 미뤄도 되냐고 했다. 하지만 난 지석이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지수에게 답을 재촉하려다 술김에 오른 용기로 그녀의 양 볼을 잡고 키스를 시도했다. 어린 지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마주했고 나는 지수의 눈을 가리며 어른들의 세계로 발을 디뎠다. 지수는 결국 나와의 관계를 받아들였다.

*

억지로 볼을 잡고 혀를 밀어 붙인다. 입 안에 해삼이 통째로 굴러다니는 느낌은 사람의 온몸에 혐오감을 자극하고 소름을 돋운다. 자라난 염오는 분열하며 증식된다. 두툼한 손으로 솜털을 쓰다듬고 반항을 내리찍는 아귀힘은 어깨에 푸른 멍을 남긴다. 그래 잠깐만 가만히 있으면 곧 떨어져 나갈 거야. 술기운에 잠시 잠깐 미친 거다. 숫자를 세자 잠깐이면 되겠지 주정이 가라앉으면 도망갈지도 몰라. 그렇다면 이 새끼는 영영 안 봐도 된다. 조금만 참아라. 박 지수. 뒤는 벽이고 앞은 김민석. 녀석의 페니스는 발기 돼 미약하게 둔덕을 건드리고 있고 녀석의 침은 얼굴을 뒤덮는다. 이 시발 새끼. 도저히 떨어져 나갈 생각을 않던 녀석의 손이 가슴으로 내려갔다. 팔을 들어 잡고 치우려고 하지만 녀석의 팔에 갇혔다. 몸을 뒤 틀어 녀석을 떨구려한다. 막걸리 몇 모금은 몸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잠깐의 몸부림을 멈추고 힘을 모으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녀석의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옷을 벗겨 냈다. 그건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고 녀석은 옷을 찢다시피 하며 나를 바닥에 밀어붙였다. 산돼지 같은 몸집의 김민석은 나를 눕히고 제 마음대로 주무른다. 싫다는 외침은 귀에 박히지도 않는지 녀석은 발기한 페니스를 구멍에 꽂기 위해 뱃살로 나를 짓누른다. 원채 약했던 피부는 김민석의 도화지가 된 듯 조금의 압력으로도 쉽게 허벅지와 팔뚝 뱃살에 붉은 멍이 새겨졌다. 어린 나이에 나는 치욕과 모멸감을 경험해야만 했다.

*

스위치를 찾아 형광등에 불을 비추자 휑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은 없었고 문은 내가 있던 공간의 나무문과 단단한 철문 단 두 개였다. 나는 망설이면서도 입구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문을 열었다. 너머에는 형광등 불빛이 미처 닿지 못하는 깊은 공간이 있었다. 이곳은 뭐하는 곳일까 빛을 밝힐 수 있지 않을까 문 주위를 확인하고 있을 때 발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무게의 소리에 나는 침을 삼키며 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렸다. 빛으로 인해 더 짙어진 그림자에서 나온 건 피를 뒤집어 쓴 지수였다. 처음에 그녀의 실루엣이 보였을 때는 살짝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지만 그녀의 얼굴과 옷에 튄 얼룩을 보고 사고가 정지 됐다. 어떻게 된 거지? 혹시 지수가 다친 것일까. 지수의 신체를 눈으로 훑고 있을 때 계단을 올라오던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뭐야 나왔어? 그녀는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이 계단을 올라 내 앞에 섰다. 깨우러 가려고 했는데 잘 됐네. 뭐해 따라와. 팔에 돋는 소름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눈치를 봤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계단을 더듬어 내려갔다. 계단의 아래 아득한 빛이 비추고 있는 곳은 교도소와 다를 바 없었다. 문은 여러 개 달려 있었고 그 중 하나의 문을 지수가 열었다. 뭐해 들어가. 지수가 두꺼운 문을 열자 풍긴 진한 피 향이 나 들어가기 망설여졌다. 소독약 냄새와 뒤섞인 피 냄새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지만 그 공간이 너무 낯설었다. 지수는 답답하다는 듯 내 등을 방 안으로 떠 밀었고 이내 문을 닫아 버렸다. 나는 닫힌 문을 바라보다 내부를 살폈다. 테이블에 놓인 각종 도구들과 어디서 구한 건지 의심되는 의약품들 그리고 의자에 결박 돼 있는 소년 하나. 나는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뭐야? 지수는 테이블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뭐해 치료 해. 나는 이 소년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살아 있는 거야. 결박당한 소년에게 다가갔다. 여기 저기 자상이 깊은 녀석은 피로 덮인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이수혁. 녀석의 노란 명찰에는 이름이 있었고 끔찍한 광경에 나는 지수를 돌아봤다. 그녀는 태평한 얼굴로 담배를 피며 왜?라고 입모양을 만들었다. 피로 얼룩진 얼굴로 나를 보고 해맑은 표정을 짓는 지수라니 나는 지금 이 일들이 모두 꿈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네가 이런 거니. 내 경악한 질문에 그녀는 입술을 핥고 그렇다고 답했다. 입술 근처로 튄 피가 그녀의 혀에 쓸려 입술 위로 번졌다. 이건 범죄야. 나조차도 어처구니없는 말이 튀어나왔고 그녀는 웃긴 말을 들은 것처럼 실컷 웃어댔다. 나도 알아 널 납치하는 순간부터 나는 범법자가 된 거지. 근데 그게 어때서. 상식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대였다. 일단 나는 소년을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부어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수혁은 신음을 낼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세미코마에 빠지지 않은 게 기적이라 할 정도로 처참했다. 가위를 들고 와 피에 눌러 붙은 교복들을 찢어내며 상처의 상태를 살폈다. 녀석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됐다. 몸에는 찢어진 문신과 묵은 상처들이 잔뜩 도배됐고 오래 된 상처에는 구더기와 고름이 들끓고 있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얼마나 괴롭히고 방치한 건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옷을 벗겨내는 중간 중간 상처들을 강하게 건드렸는데도 수혁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동공반사는 꽤 빨랐다. 아직 정상이라는 소리였다. 어쩌면 이 녀석에게는 불행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나는 테이블에 어지럽게 놓인 의약품들을 뒤져 수혁의 상처에서 구더기를 잡아내고 썩은 살을 도려냈다. 벌어지는 살에 소독약을 뿌리고 상처들을 정성 들여 봉합했다. 지수는 내 행동들을 느긋하게 관찰하며 술을 마셨다. 온 몸을 덮는 땀을 닦아내며 상처 봉합을 마치고 드레싱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했지만 환경적 열악함이 있었다. 지수를 돌아봤다. 그녀는 술을 마시며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피를 닦아낸 수혁은 알몸으로 죽어가고 있었고 나는 납치된 상황에서 아이를 치료했다. 납치범이자 아이를 죽음까지 몰아넣은 박 지수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사실 나는 비양심적인 삶을 살아왔다. 의사가 돼 많은 사람들의 살을 갈라왔지만 그것은 생명 윤리를 실천하고자 해서 행한 일들은 아니었다. 내 직업의 선택과 목표는 오직 부와 성공이었다.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을지언정 무시를 받지 않는 삶을 살고자 그렇게 발버둥을 쳐 왔었고 그 일이 설령 의사로서의 의무를 버리는 일이었다고 해도 나는 기꺼이 해왔었다. 그런 내게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상식 그리고 동정심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고 무엇보다 숨만 간신히 쉬고 있는 저 아이를 살려야겠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또 그게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거 같았다. 나는 지수를 보고 결심했고 실천에 옮겨야 했다. 목젖은 몇 번이고 가라앉았고 지수의 소음과 목 가다듬는 소리만이 방을 채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접근하기로 결심했다. 지수는 재미있는 걸 보는 표정으로 망설이는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119, 119가 필요해. 지수는 말없이 술을 따랐고 새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래서? 119를 불러줘.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싫은데? 장난이 아니야. 구급차를 부르지 않으면 이 녀석은 곧 죽어. 녀석이 죽는다는 말에 지수의 얼굴이 굳었다. 벌써 죽으면 곤란한데, 말라붙은 피 자국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지수의 얼굴은 기괴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닐 무렵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당시 시골에는 장례식장이라는 개념이 없어 할아버지의 장례도 당연히 집에서 치러졌다. 평소 할아버지가 지내던 방은 병자의 기색이 짙어 근처에 가지도 못하게 하더니 그날따라 온 가족이 할아버지가 지내던 방에 모여 앉아있었다. 할아버지는 가족들 얼굴을 모두 바라보고 조용히 눈을 감고 꺼져가는 숨을 기다렸다. 깊게 패인 주름이 팽팽하게 당겨지도록 말라비틀어진 할아버지의 얼굴은 거무죽죽했고 힘겹게 오르내리는 가슴은 금방이라도 푹 주저앉아 버릴 거 같았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머리를 이미 동쪽으로 옮긴 후였다. 가족들은 조용히 할아버지의 숨이 꺼져버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손을 쓰다듬어줄 뿐 울지 않았고 어머니는 꽤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의 마지막 숨 소리는 곡소리와 같다. 거품이 기도를 막아 턱턱 막히는 숨소리는 꺼억꺼억 거리며 넘어간다. 할아버지는 고요하게 가지 못하셨다. 두 팔을 휘저으며 괴로워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시체와 다를 바 없었다. 어린 나는 할아버지 방에 모여 묵묵히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들이 대단해 보였다. 멀찍이 떨어져 앉아 관망하는 죽음은 나에게 아주 먼 이야기였다. 한 마을에 살고 있던 먼 친척 한 분이 벌떡 일어나더니 깔끔하게 준비 된 옷을 들고 밖으로 나갔고 나는 그 모습에 이끌려 그의 등을 따라갔다. 그는 사다리를 타고 지붕으로 올라가더니 북쪽으로 난 뒷산을 향해 태주 복 태주 복 태주 복 그렇게 옷을 펄럭이며 할아버지의 이름 세 번을 외치고 내려와 할아버지의 가슴에 그 옷을 덮어주고 마당 구석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도 그의 곁에 서서 담배를 태웠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곁에서 그저 묵묵히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어머니는 하품을 하며 나와 장례 치를 준비를 하셨다. 아버지는 미리 챙겨 놓은 재료들을 챙겨 들어간 후 할아버지 방문을 닫아버렸고 작은 아버지는 근조謹弔라고 쓰인 등을 대문 앞에 걸었다. 나는 마루에 앉아 있는 할머니 곁에 앉아 모르는 척 물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디 갔어요? 할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씁쓸한 웃음을 짓고 그랬다. 까마귀랑 저 멀리 여행 가셨어. 어린 나는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할머니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언제 오세요? 어쩌면 잔인할지도 모르는 물음. 할머니는 무거운 손으로 내 머리를 만지며 얘기했다. 글쎄 언제 오시려나. 우리 민석이 보고 싶어서 빨리 오셔야 하는데, 만약에 할아버지가 늦으면 이 할미가 데리러 가마. 잠깐의 휴식 후 몰아치는 손님과 장례 절차로 가족들은 나에 대한 관심을 뚝 끊었다. 내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어떤 걸 먹든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거다. 나는 낯선 사람들이 집안을 배회하는 걸 구경하다 문뜩 떠난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병풍 뒤로 숨어들었다. 작은 틈새에 진 그림자 그 뒤에 할아버지가 누워있었다. 짙은 향냄새와 죽은 이의 싸늘한 냄새를 맡으며 나는 할아버지를 봤다. 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할아버지는 간간히 볼 때 봤던 병자가 아니었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의 몸이 허우적거리던 게 떠오른다. 언젠가 봤던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 나는 진짜 까마귀가 할아버지를 찾아온 거 같아 방 안을 샅샅이 뒤졌다. 이렇다 할 할아버지와의 기억들은 없으면서 그래야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조금 갔다 돌아오세요. 물론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건 잘 알고 있었고 또 할아버지는 기적적으로 살아오지도 않으셨다. 수의와 이불로 꼼꼼히 싸인 할아버지는 새로 지은 관에 넣어 선산의 한쪽에 묻혔다. 까마귀는 언제 할아버지의 영혼을 데리고 갔을까. 나는 장례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끝난 후까지 까마귀의 모습은 보질 못했다.

*

지수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의 손에는 백색 항아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눈으로 봐도 유골함이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는 수혁의 앞에 의자를 끌어다 유골함을 올려뒀다. 지수는 수혁의 뺨을 때리고 발로 걷어찼지만 녀석이 일어날 리 없었다. 동공반사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지수는 테이블에 놓인 잭나이프를 가지고 와 칼날을 꺼내 수혁의 허벅지에 모조리 박아 넣었고 그제야 수혁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소리로 증명했다. 퉁퉁 불은 눈이 열렸다. 안녕? 지수는 그 앞에 앉아 반갑게 인사했다. 유골함을 안아 든 채였다. 수혁의 입술은 하얗게 말랐고 조금만 벌어져도 툭 터져 선혈이 배어나왔다. 죽여주세요. 수혁은 죽여 달라고 빌었고 지수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아직 안 돼 그냥 가기에는 허무하잖아? 딱 내 딸이 겪은 고통의 두 배만 아프면 돼. 지수는 자비로운 척 말을 했다. 딸? 딸은 뭐지. 지수는 수혁을 향해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왜 사과하는 거야. 그러지마 네가 사과하면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니? 지수는 잭나이프를 뽑아들었다. 수혁의 몸은 더 이상 온전치 않았다. 나는 지수의 손목을 잡고 나이프를 빼앗아야 했다. 그만해. 지수는 의미 잃은 고문을 멈추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안 돼 까마귀가 시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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