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필’의 감성,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정필’의 감성, 다시 느낄 수 있을까
  • 김산
  • 승인 2020.06.17 09:17
  • 조회수 88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양일보 편집국 부국장 유환권

코로나 때문에 대면강의를 하지 못하는 대학 4학년 딸내미가 최근 며칠간 과제를 한다며 낑낑댔다맨날 놀러만 다니는줄 알고 탐탁잖게 생각하고 있던중 그래도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를 쥐어 짜는 모습을 보니 네놈이 취업 때문에 신경은 좀 쓰이나 보다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말 오후. 커피좀 산다며 나간 아이의 방에 들어가 강의 노트를 쓱 훔쳐 봤다평소 영혼이 자유로워학문에 크게 정진하지 않던 아이를 이토록 지남철 같이 방구석에 붙잡아 둔 요물이 뭔지 궁금해서였다그런데 헛...강의 노트에 쓰인 아이 글씨가 충격을 줬다. 요즘 아이들 표현대로라면 뼈 때리는수준의 난필. 그야말로 용사비등체(龍蛇飛登體·용과 뱀이 뒤엉켜 날아오르는 글씨)였다자식놈 대학 4학년 졸업반이 돼서야 글씨체를 본 애비도 참 어지간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준의 글씨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83학번 애비의 기준으로 보면 거의 초등학교 5학년 정도의 한글 필기는 참으로 큰 당혹감을 안겼다아이의 글씨가 정말 용과 뱀의 혼연일체 무당춤꼴이 된건 컴퓨터와 휴대폰 탓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자판만 두들겨 댔으니 글씨가 그모양이 된 것이다.

커피를 사 들고 룰루랄라콧노래까지 부르며 돌아온 아이에게 살짝 훈계를 하자 이놈 표정이 굳어진다. ‘아빠, 요즘이 어느 세상인데 손글씨 얘기세요?’ 하는 억울함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미국의 얘기를 해 주었다.

매년 1233억의 미국인들은 손글씨 쓰기를 한다. 미국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던 존 핸콕의 생일이 바로 123일인데 해당일을 펜으로 글쓰기의 날로 정해 편지도 쓰고 일기도 써 본단다일부에서는 필기구 제조사의 속셈이 깔려있는 행사라고도 하지만, 그래도 현대인들에게 손으로 글 쓰는 것의 중요함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참뜻을 더 높인 산다... 그날 아이가 금세 , 아바마마의 뜻을 받들겠나이다라며 머리 조아릴 것을 기대한건 아니었지만 제 애비더러 라떼족이라고까지 항변하지 않는걸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듯 했다.

레이저 프린터나 이메일, 휴대폰 카톡의 빠르고 편리한 문자 만능 세상에 손글씨 운운 하는게 참 뒤떨어지는 사고라고 하면 어쩔수는 없겠다하지만 그런 것에 너무나 익숙한 아이들에게 정필의 감성과 인간적 숨결이 배어나오는 손 글씨의 개성 같은걸 조금이나마 전해 줄수만 있다면 좋을 듯 하다자판 문자의 글꼴이 오만가지라 해도, 손끝을 통해 종이에 담기는 글씨의 정감을 대신할 수는 없으니까숙제검사에 밀려 겨우겨우 쓰던 학창시절 일기였지만 세월 지난 지금 스승님으로부터 받은 참으로 소중한 선물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도 그중 하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