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돈 박사 서거 60주기 추모 예배

최영근 교수(기독교학과/인돈학술원장)
최영근 교수(기독교학과/인돈학술원장)

 2020년 8월 13일에는 인돈 박사 서거 60주기 추모 예배가 있었다. 인돈 박사는 우리 대학을 세운 미국 남장로 회의 대학설립위원장(College Committee)이며 초대 학장으로서 대학설립과 발전에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분이다.


 1948년에 대학설립 논의가 시작되어 1956년에 대학이 설립되는 데까지는 난항의 연속이었다. 해방 직후 혼란한 한국의 정세 속에서 대학설립 계획을 마련하고,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대학설립 절차가 연기되고, 대학설립 과정에서 교수 요원을 확보하고 대학의 건물과 시설을 갖추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악조건 속에서도 기독교적 정신으로 국가와 사회와 교회에 이바지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기독교대학 설립의 비전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실현한 선교사들의 수고에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 누구 보다 앞장서서 대학설립의 중책을 감당하여 “불가능할 것 같은 대학설립의 비전을 실현한” 인돈 박사의 헌신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대학의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유능한 교수를 모집하는 일뿐만 아니라, 대학의 건물과 시설을 만들기 위한 재원을 모금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정부로부터 대학설립 인가를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심지어 대학 본관건축의 공사과정을 감독하고, 하자 없이 공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살폈다. 암 투병을 하면서도 대학 일에 매진하다가 결국 1960년 6월에 학장직을 사임하였으나, 그해 8월 13일에 두 달 만에 미국에서 돌아가셨다.


인돈 박사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 만에 그를 추모하는 예배가 처음으로 정성균 선교관에서 열린 것은 뒤늦은 감은 있지만 감사한 일이다. 물론 인돈 박사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우리 대학이 세워지고 발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비전과 헌신적인 노고가 없었다면 많은 사람의 관심과 기도와 노력이 모여 한남대학교라는 열매가 맺힐 수 있었겠냐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를 추모하는 것은 한 사람의 개인을 찬양하고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통해 대학구성원으로서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다짐하는 기회로 삼기 위함이다. 인돈 박사의 비전은 한남대학교의 설립자들과 이 대학에서 가르치고 일하고 공부한 수많은 한남인들이 함께 품었던 비전이었다. 오늘 우리는 그 비전과 헌신의 열매이다. 인돈 박사를 추모하면서 우리가 되새겨 보아야 할 비전과 헌신의 삶은 무엇일까?


 첫째로, 인돈 박사는 사람을 바르게 길러 사회에 이바지하는 참된 교육의 비전을 가졌다. 1912년에 21살의 젊은 나이에 한국 선교사로 들어와 교육선교사로 일하면서 그는 미국 남장로회가 세운 미션스쿨인 군산 영명 학교와 전주 신흥학교에서 교장을 맡아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가 선교사로 일하던 때는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기였다. 군산 영명 학교 교장으로 일할 때는 1919년 삼일운동을 보았는데, 영명 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군산지역에서 삼일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일제의 폭력과 압제에 굴하지 않고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앞세워 독립 만세운동을 하는 한국인들에게 깊이 공감하였고, 미국 교계와 사회에 한국 독립운동의 대의와 정당성을 알리며 지지와 도움을 호소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기독교가 한국인들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훌륭한 기독교 학교를 통해 차별화된 기독교적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 믿었다. 당시 식민지 한국에서 일제가 밀어붙이는 교육은 일황  (日皇)에 충성을 다하는 제국주의 교육이었기 때문에 그런 교육은 사람을 정신적, 육체적 노예로 만들 뿐이라고 진단했다. 기독교 진리에 입각한 올바른 교육으로 사람과 사회를 건강하게 이끄는 기독교적 교육이야말로 한국에 꼭 필요하고 중요한 사명이라고 역설하며 이를 위한 기독교 학교 발전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념에 따라 당시 한국에서 기독교 학교를 발전시키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일제가 식민통치 말기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이를 거부하는 기독교 학교들을 폐교하겠다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그는 미국 남장로회 교육 선교의 책임자로서 선교회가 한국에서 오랫동안 힘겹게 발전시킨 학교들을 당당하게 폐쇄함으로써 정신적 지조를 잃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폐교당한 학교들은 일제 패망 후에 다시 개교하여 지역사회에서 훌륭한 기독교 명문사학으로 발전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제국주의와 물질주의에 물들지 않고,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여 진리와 자유와 봉사를 추구하는 건강한 인재를 길러내는 참된 교육이 인돈 박사가 한남대학교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비전이었다.


 둘째로, 농업사회에서 급격히 산업사회로 변화되는 한국에서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가 되려면 과학교육과 직업훈련과 기술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론과 지식만 탐구하여 학문의 상아탑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질병과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구제하고 도우려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지식과 실제적인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확신에 따라 한남대학교는 개교할 때 신학과 인문학과 과학을 함께 공부하여 이를 두루 섭렵한 인재를 기르고자 했다. 과학에 인문학적 소양이 어우러지고, 신학적 영성과 인간 영혼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더 해질 때, 이러한 융합적인 전인교육은 복잡한 사회의 문제들을 치유하고 해결하는 인재들을 길러낼 것이라고 믿었다.


 셋째로, 인돈 박사는 기독교 대학은 지성과 인성에 영성을 키우는 교육을 감당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생각하는 교육자상(像)은 전공 지식의 전문성을 가지고 학생을 가르치는 학자인 동시에 삶의 모범으로서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선생님이었고, 학생들의 영혼을 살피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주는 진정한 신앙인이었다. 따라서 학생들이 학문과 인격과 신앙을 교수들로부터 보고 배우며, 지성과 인성과 영성을 겸비한 인재로 자라나기를 원했고, 한남대학교가 학생들을 그렇게 교육하는 대학이 되기를 꿈꿨다.


 오늘날 많은 대학이 위기에 직면해 있고, 우리 대학도 예외는 아니다. 인돈 박사를 추모하며 그의 비전과 헌신의 삶을 되새기면서 우리 대학의 정체성과 우리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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