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 서대원 학예연구사
▲중앙박물관 서대원 학예연구사

흔히 발굴이라 하면 인디아나 존스를 연상케 하는 고고학자가 붓을 들고 땅속을 조심스럽게 파내려 가는 것쯤으로 인식할 것이다. 가끔 매체를 통해 한글 금속활자 1,600여 점 쏟아져”, “광화문광장 육조거리 발굴현장 시민공개와 같이 주목을 이끌만한 기사를 접할 뿐, 우리 생활과는 먼 얘기로 생각된다.

그러나, 1년간 1,500건 이상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문화재 발굴은 더 이상 먼 얘기가 아닐 수 있다.

필자는 1995년 대전 법동(현 한마음아파트 뒤편)에서 문화재 발굴조사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우리 대학이 위치한 대덕구는 삼국시대에 우술현(雨述縣)이라 불리던 곳이었는데, 법동에서 우술현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을 때에 발굴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군제대 후 참여한 대전 노은동유적(대전월드컵경기장 부지)2년에 걸쳐 구석기부터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유해까지 발굴된 곳인데, 대규모 발굴인 만큼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특히 표토를 제거하는 굴삭기 1대가 밤사이 감쪽같이 사라진 적이 있었는데, 발굴조사단이 취침에 들었을 때 절도단들이 모두 분해해서 반출한 것이다. 당시 아버지처럼 따랐던 기사님이 이제 굴삭기 할부금 다 갚았는데, 어쩌누하시면서 흘리던 눈물을 기억하면 여전히 죄송한 마음이 가득하다. 다행히 이후 문화재발굴법인에 소속된 전문기사님으로 오랫동안 활약하게 되셔서 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대전 용호동 구석기유적(대청댐 보조댐 앞쪽)을 만나게 되며, 본격적으로 발굴조사 경험을 쌓고 고고학을 전공하기 시작하였다. 용호동유적은 10만 년 전, 대전에 사람이 들어와 살았던 증거를 보여주는 중요유적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당시 이례적으로 대전시장이 방문할 만큼 주목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때에도 현장사무실 습격사건이 일어났는데, 사무실 내부에 있던 구석기와 각종 기물들이 뒤집어져 있었던 것이다. 가끔 일반인들이 구석기를 보면 돌맹이라고 표현할 때가 있는데, 그 표현이 그렇게 고마움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 현장사무실에 침입한 절도범들은 구석기들은 그대로 둔 채, 카메라ㆍ측량기 등과 냉장고에 있던 먹거리들만 훔쳐 달아난 것이었다. 그 구석기들 중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받는 슴베찌르개(구석기시대 화살촉), 신석기시대에만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갈린석기와 갈판은 현재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선사ㆍ고대관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중요유물들이다. 지금도 그 절도범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이다. 돌맹이로 인식한 덕분에 용호동유적은 대전시 기념물(42)로 지정되는 성과를 거두었고, 몇몇 구석기들은 프랑스 파리인류박물관에까지 다녀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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