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 존서머빌 박사

 

 본교 설립위원 7명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그는 지난 5월, 향년 95세에 미국 자택서 별세했다. 서박사의 소천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대학을 위한 그의 뜻을 모두가 기억했으면 한다.  

 자녀 8명 중 3명을 목회자로 키울 만큼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온 서 박사는 목회자가 돼 195426세의 젊은 나이에 아내와 함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오게 됐다. 서 박사는 한국에 입국해 대전대학(현 한남대학)의 대학설립위원으로 대학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이후 기독교 대학의 창립 정신인 진리·자유·정의를 실천하도록 많은 젊은이에게 일깨워줬다. 기독교 인재로서 사회에 기여하고, 궁극적으로 화평(reconciliation)을 통해 평화롭게 남북을 통일해 나라를 지키며 행복한 삶을 이룰 것을 강조했다.

 1968년부터 본교 영문학과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94년 은퇴까지 40년간 복음 선교와 대학교육 선교에 헌신한 마지막 세대의 교육선교사이다. 한남대학을 퇴직하며 1954년 미국 남자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 받은 교수로 봉직하면서 본교의 발전 및 후학 양성에 크게 공헌한 연유로 19942월 대학장 금장을 수상했다. 이후 1998년 제5회 한남 인돈문화상까지 입상했다.

 서 박사는 동료 교수들을 아끼는 교수로 유명했다. 그는 동료 교수들에게 대학에 대한 애교심을 갖도록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시에 교수들에게 학교를 운영하는 행정지도자의 역할과 중요성을 인지시켰고 학교 일에 그가 건네는 인사말은 오늘은 총장한테 어떤 건의를 할 예정입니까?”였다. 이를 통해 서 박사는 교수들 스스로가 대학의 주인이 돼 학교와 관련된 일에 염려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격려했다.

 ‘한국을 너무나 사랑한 미국인으로 알려진 서 박사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언어에 능통했다. 한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를 나눌 때 본관이 어디냐?”라고 물을 정도였다. 한국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던 서 박사는 고고학 유물과 고문서, 교회사 민속품, 교사자료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해 본교 중앙박물관에 기탁했다. 미국 자택에 문패에는 한자로 牧師 徐義必’(목사 서의필)이라고 새겨져 있다. 나아가 한국족보사를 연구해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경력이 존재하며,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함께했던 인물이다. 한국 사회의 교육 발전과 민중화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해 북한 동포 지원사업에 앞장섰다.

 서 박사의 한국 사랑은 노년까지 이어졌다. 2014년 서 박사는 본교 정성균 선교관 개관 예배에 참석했다. 소장한 자료를 기증하는 시간이 되자 서 박사는 교만하거나 이기적이거나, 부자가 되려 하지 말고, 가난한 학생들을 더욱 잘 보살펴야 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북한 동포들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 싸우지 마라"라는 간곡한 당부의 말을 전했다. 서 박사는 1996년부터 2007년까지 북한을 수차례 방문해 현지 동포들에게 여러 물품과 의료품을 직접 전달했다.

 서 박사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숨진 동생 때문이었다. 그의 동생 스티븐(Stephen S. Somerville)1953년 한국전쟁에 참전해 대구 지구에서 부상을 당했다. 그 후 요코하마의 미국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다. 서 박사와 가족들은 슬픔에 휩싸였지만, 한국을 원망하지 않았고 한국이라는 작은 땅에서 젊은이들이 희생하는 모습을 보고 선교활동을 하며 사랑으로 승화했다.

 선교활동이 시작된 1954년 전쟁의 피해가 극심해 한국 땅은 황폐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기아와 병마에 시달리며 비참한 하루를 보냈을 시기이다. 당시 서 박사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목포와 주변 지역을 다니며 낯선 이방인으로서 한국인들에게 따뜻한 말과 신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맞았다. 이러한 선교활동을 4년간 지속하며 얻은 경험은 한국에서의 40년간 선교활동을 하게 되는 중요한 원동력이됐다.

 서 박사는 평생에 강의나 강연 또는 설교를 통해 사람들에게 수많은 메시지를 남겼다. 그의 메시지에는 네 가지 특별한 관점을 띄고 있었다. '그의 메시지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언어와 종교 등 모든 것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바탕으로 나오는 깊은 심연의 소리이다' '그의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외침 소리이다‘ '그의 메시지는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외침 소리와 같이 현 사회의 기득권자들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의 메시지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통일을 향한 간절한 복음적 외침의 소리로 울리고 있다'

 위의 네 가지를 관점을 띄는 한국어와 영어 20개의 글을 담은 어록이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이야기 서의필 목사의 한국 선교라는 책을 통해 공개됐다. 어록의 내용이 공개되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 박사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그를 그리워하게 됐다.

 서의필 교수는 퇴임 후 20년만인 20149, 86세가 되던 해에 본교를 방문했다. 이날 서 교수는 '서의필홀'을 개관하고 귀중한 소장품을 대학에 기증하는 자리로 참석했다. 행사를 시작하기 전 새로 건립된 정성균 선교사 기념관 창립 예배를 통해 한국에서의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설교를 통해 본교의 창립 정신을 강조하며, ‘남북통일을 향해 새 역사를 창조할 것을 주문했다.

 대학은 서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56주년 기념관 1층 대강당의 이름을 서의필홀로 지었다. 서 박사와 가족들이 같이 살았던 선교사촌 서의필 하우스는 인돈학술관으로 활용하는 등 교내 곳곳에서 서의필 박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광섭 총장은 오랜 시간 한남대에서 학생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시고,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셨던 서 박사님의 소천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라며 그분의 창학정신을 모든 구성원들과 더불어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라고 전했다.

 한편 본교는 서의필홀 앞에 추모공간을 마련했으며, 학교 홈페이지에도 온라인 추모관을 개설했다. 67일 교내에서 서의필 박사 추모예배 및 서의필 전기 출판기념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서의필 박사는 한남대는 내 인생을 대변하는 하나의 작품과도 같다라며, “이렇게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교만하거나 이기적이거나 부자가 되려 하지 말고, 특히 가난한 학생들을 더욱 잘 보살펴야 한다라고 전했다. 이젠 하늘의 별이 된 서의필 박사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우리는 그의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가 전해준 진리·자유·정의를 바탕으로 모든 사람이 안전한 통일된 세상을 만드는 한남인이 되겠습니다. / 유정수 기자

"한남대는 내 인생을 대변하는 하나의 작품과도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교만하거나 이기적이거나 부자가 되려하지 말고, 특히 가난한 학생들을 더욱 잘 보살펴야 한다"-존 서머빌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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