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교수(국어국문창작학과)
김홍진 교수(국어국문창작학과)

 얼마 전 대통령이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를 전후한 일련의 전개 과정이 보여준 사태는 우리가 처한 운명을 다시 확인해 주었다. 친숙한 낯섦이랄까. 익숙함은 일제 강점과 이승만 이래 친일 친미파가 득세한 현실에서 펼쳐졌던 풍경의 자동 반복 재현에서 온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마술사는 각설이처럼 죽지도 않고 또 온다. 낯섦은 고뇌에 찬 결단이란 명분으로 다수의 보편 정서를 대놓고 위반하는 점이다. 관습적 지각을 배격하는 탈자동화 수법을 예술의 영역이 아닌 외교 영역에서 구현한 점이 새롭다. 

그러나 이 글의 목표는 그 의미를 따지는 데 있지 않다. 군위안부, 제3자배상, 독도, 오염수 방류, 욱일기 자위함 입항 문제 등에 관심은 갖되, 편향은 자칫 현실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경계하자는 것이다. 관심은 물론 한일 관계의 과정이 은폐 외면했던 문제들을 재전유하는 계기와 연대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게 한다. 개인이든 국가든 기억은 현재와 미래 정체성을 구성한다. 그것 없이 주체는 연속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과잉 몰입은 당면한 삶의 현실과 전망 부재의 불안을 마취시킬 수 있다. 논란의 부양은 현실을 지우고, 역사로 초점을 돌리며, 먹고 사는 삶의 문제를 흐린다는 점에서 기만이다.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은 소중하다. 하지만 현실을 구성하는 삶의 구체 또한 소중하다. 특히 청년 세대의 당장의 현실 문제는 사회안전망 부재와 양극화에 따른 주거, 소득, 음서제, 등록금, 결혼, 출산 등등이다. 모두 먹고 사는 문제와 연관해 있다. 어쩌자고 ‘먹고사니즘’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이 자조 섞인 신조어는 우리, 특히 청년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과 전망 부재의 미래 시간을 환기한다. 역사에 대한 몰입은 이런 삶의 구체를 유예 은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는 안도할 것이다. 

일본의 자리에 중국을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반일 반중 정서, 또는 중일이 우리에게 갖는 혐한은 짝패처럼 같은 논리로 작동한다. 삼국은 파시스트적 속도의 고도성장 전략을 구사해왔다. 그 결과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 가능한 때가 있었다. 활황 시절에 역사문제는 그리 큰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장이 멈추고 역사는 과잉 이데올로기화된다. 문제는 이게 암울한 현실과 미래 불확실성의 공포가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감춘다는 데 있다. 내부 문제를 감추기 위해 외부를 적으로 돌리는 수법은 낡고 익숙한 방식이다. 강화되는 혐오는 이런 사태의 한 증상이기도 하다.

서로 얽힌 사악한 감정의 시원은 역사문제겠지만, 구조적 모순 은폐를 위한 혐오 감정의 부양책일 수 있다. 역사로 우릴 내몬 건 분명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에 무능하고 무관심한 정부와 기득권에 있다. 그들은 현실을 잊고 외부로 눈을 돌리길 바란다. 권력은 혐오에 열성인 세태가 기특하리라. 철학자 에릭 코바의 말을 변용해 삼국의 대중은 공히 지배 이데올로기의 특수 이익을 위해 혐오와 갈등을 부추기는 일반적 양상의 희생자다.

저작권자 © 미디어 한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